앞가림을 잘한 공사장 가림막이 늘고 있다. 이판사판 공사판이 만들었던 적벽대전 같은 살풍경은 옛말이다. 예술가들이 본처(本處)인 미술관을 버리고 경쟁적으로 외도하는 곳이 요즘 공사장 가림막이다. 창의의 '신(新) 적벽대전' 덕에 가림막에서 살맛 나는 도시 진경들을 만난다.
발품을 조금만 팔면 도심에서 공짜 명품들을 만끽할 뿐 아니라 가림막의 진화와 걷는 만큼 알게 되는 서울의 멋과 여유를 즐길 수 있다. 서울의 적벽대전은 지금이 최고조다. 강익중·최정화·허진·신현중 같은 대표급 예술가들이 서울 요지 가림막에서 '창의 경쟁'을 펼치고 있다.
- ▲ 서울 명륜동에 설치된 최정화의‘천 개의 문’(사진 왼쪽)은 아현동 재개발 공사장에서 모은 문짝 711개로 만들었다. / 박삼철 제공
하나하나 손으로 그린 '오리지널' 작품 2616개의 공사 후 처리도 관심사다. 작가는 일본 우토로 한인(韓人) 마을로 보내려 하고 서울디자인재단은 작품의 본처인 서울에 영구히 새기자고 교섭 중이다. 이 작품에 도전장이 던져졌다.
'현대 미술의 문제아' 최정화(48)가 최근 서울 명륜동에 문짝 711개로 만든 가림막 '천 개의 문'을 완성한 것이다. 어떻게 문으로 가림막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발상이 기발하다. 문은 아현동 같은 재개발 공사장에서 모두 모았다.
한데 불러 모아 위로하니 그 문을 드나들었던 삶들까지 되살아난다. 형상도 압권이다. 문만 상하좌우로 덧붙이고 덧쌓았는데 만다라 같은 일상의 거대한 기념비가 되었다. "인간은 반개(半開)한 문적(門的) 존재"라 갈파한 바슐라르의 완성판이다.
문제적 제안을 선뜻 주고받은 작가와 건축주의 이심전심으로 작품료는 5000만원 선이다. 야외 대형작품의 작품료로는 높지 않지만, 문은 재활용했고 공공 성격의 작업이라 이해를 맞췄단다.
- ▲ 루이비통 파리 매장에 설치된 가방 모양 초대형 가림막. / 박삼철 제공
서울시의 디자인공원 조기 개장에 따라 작품이 6월 예정보다 일찍 철거돼 아쉽다. 하지만 이것이 가림막 작품의 운명. 영원불사(永遠不死)하는 미술관 작품과 달리 가림막 작품은 하루하루 치열하게 도시의 추와 싸우다 시한부 삶을 마감하는 비장미로 산다.
신현중(56) 서울대 교수의 가림막 역시 동물로 얘기를 푼다. 서울 명동의 아파트 공사장에 새빨간 적벽(赤壁)을 치고 그 위에 산양·사슴·가젤 등의 우제류(偶蹄類)를 순백의 부조로 띄웠다. 희생양의 재조명을 통해 지속가능한 삶의 환경을 묻는 작품은 입체적인 부조 조각이자 밤이면 빛 조각으로 바뀌어 보는 눈이 즐겁다.
올해는 설치작가 양주혜가 국내에 가림막 작업을 도입한 지 꼭 20년 되는 해다. 내친김에 묻자. 왜 이렇게 가림의 미학에 신경을 쓰는 걸까? 왜 가림막은 진화를 택하는가?
- ▲ (왼쪽)영국 작가 뱅크시의‘꽃을 던지는 사람’. (오른쪽) 허진의‘동대문 지역성과 역사성에 관련된 11가지 추억’.
공공예술의 유행은 이에 대한 대응이다. 도시설계가 얀 겔은 디자인의 최고경지로 나가 놀 수 있는 도시를 꼽았다. 'Talk·Play·Love'의 디자인이 공공예술의 요체다. '가림막의 원조' 양주혜의 오래된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삶이 예술일 수 있다면 그 삶의 모습을 어떻게 그릴까?'
예술은 삶을 그려야 한다. 도시는 그런 예술에 자리를 허락해야 한다. 이게 주가지수보다 더 절박한 보헤미안 지수를 높이는 첩경이다.
미술정보 - 이안아트(www.iaanart.com)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