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그림들2010. 2. 11.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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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앙리 폴 고갱(Eugène Henri Paul Gauguin, 1848년 6월 7일 ~ 1903년 5월 8일)은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이다. 파리에서 태어났다.

고갱의 생애는 파란만장하다. 아버지는 자유주의자로서 망명하여 남미 리마로 가던 도중에 죽고, 그후 고갱은 7세 때에 고국에 돌아온다. 바다를 동경하여 선원이 되어 남미도 항해하지만, 결국 포기하고 증권 거래소에서 일했다.
 
거기서 돈을 모아 결혼하여 평화로운 생활이 계속되었으나 여가가 있을 때마다 회화에 전력하여 살롱 전에 입선하였다. 피사로를 알게 되어 인상파의 영향을 받은 후, 인상파 작품을 사들이고, 그 화가들과도 교제하여 1880년 제5회 전시회부터 인상전(印象展)에 그의 회화를 출품한다. 이어 회화에 대한 정열은 더욱더 왕성해져서 1883년에는 증권거래소를 그만두고 화가로서 새출발을 한다.

그러나 회화는 생활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돈은 다 떨어져서 아내의 고향인 덴마크로 가는데 덴마크에서 발표한 일도 실패, 고갱은 처자를 남겨두고 단 하나의 어린아이를 데리고 파리에 나타났다. 그러나 생활은 궁핍하여 포스터를 붙이는 노동도 했다. 그리고 1886년부터 브르타뉴의 퐁 타뱅으로 가서 젊은 화가들과 만나, 인상파의 그림에 만족하지 않고, 독자적인 화풍을 창시, 평면적인 채색으로 장식적인 그림을 그리면서, 그의 화풍을 따르는 젊은 화가들과 '퐁 타벵(Pont-Aven) 파'를 창립하였다.

파리로 돌아가서는 고흐를 만났다. 그러나 고갱에게는 미개국에 대한 정열이 있었다. 문명의 허위도 좋아하지 않았다. 원시 속에는 꿈이 있다. 거기에는 시(詩)가 살아 있다. 고갱은 1887년 봄에 남미로 건너가고, 다시 마르티니크 섬으로 가지만 병으로 인한 고뇌로 귀국한다. 그리하여 이듬해 퐁 타뱅으로 다시 가 거기에서 젊은 화가들과 만나 새로운 회화의 이론을 주장한다.

이어 고흐의 초대로 아를르에도 가지만 그 우정은 깨져 버려, 재차 미개척의 땅을 그리워한다. 그 염원을 달성한 것은 1891년으로, 고갱은 태평양의 타히티 섬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 남방의 색채와 미개한 생활은 그리던 땅에 잘 맞고, 그는 그 감동에서 수많은 작품을 그려 낸다. 고갱은 한번 파리에 돌아오지만, 1895년에는 최종적으로 타히티에 돌아간다. 그러나 그림 제작하는 것 외에는 궁핍과 병과 싸우는 생활이고, 1901년에는 도미니카 섬으로 옮겨 가서 고독한 생애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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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

영원히 유럽을 떠나 태평양의 섬으로 돌아가버린 고갱은 1905년 그곳에서 5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그는 이미 심각한 병을 앓고 있는 상태였다. 알코올 남용은 그의 심장질환과 피부발진을 악화시켰으며, 여기에 매독까지 겹쳤다. 이처럼 좋지 않은 건강 상태에도 불구하고 만년에 이르기까지 그의 왕성한 창조력은 멈추지 않았다.

1898년부터 1900년 사이 그는 파페에테에서 여러 점의 걸작을 탄생시켰는데, <백마> 역시 이 시기에 그려진 작품이다. <백마>는 한 약사의 주문으로 그려졌는데, 작품이 완성되고 난 후 주문자는 색채가 반자연주의적이라는 이유로 작품 구입을 거부하였다.(무엇보다 그는 화면 앞쪽의 말이 초록색으로 그려진 것에 대해 불평을 늘어 놓았다.)고갱의 양식은 당시 유럽 대중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때문에 그는 작품 판매로 인한 수입을 전혀 얻을 수가 없었다.

<백마>의 단순화된 구성 속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이고 상징적인 요소들이 숨겨져 있는데, 예를들어 화면 속에 그려진 말의 모습은 파르테논의 프리즈 장식과, 고갱이 자주 인용했던 그림인 뒤러의 판화 <죽음과 악마의 기사>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고갱의 원시적인 회화 양식은 오랜 기간 동안의 연구를 통해 얻어진 것이며, <백마>를 그리던 시기에는 이미 완숙의 경지에 이른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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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위에 탄 인물은 이미 고객에게 가까이 다가와 있던 ‘죽음 저편으로의 여정’을 상징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은 여전히 창조적인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그림과 같이 고갱이 그린 인물들에게서는 그가 브르타뉴와 대 양 저편에서 구하고자 했던 야생적이고 원시적인 숭고함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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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주문자가 크게 불평을 늘어놓았던, 화면 앞쪽에 있는 말의 푸른색 털은 고갱이 자연 그대로의 색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낸다.

고갱은 현실을 재현하는 수단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 생각, 심리, 상태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색채를 사용했고, 이는 새로운 양식, 즉 표현주의와 추상주의를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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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앞쪽에 있는 꽃의 모습에는 원근법적인 구도가 결여되어 있다. 고갱은 평면적인 배경에 순색의 색채를 칠하고 타히티의 전통 의상 파레오를 연상시키는 장식적인 곡선을 사용함으로써, 이와 같은 이차원적 이미지를 부각시킨다. 고갱의 작품을 더욱 매혹적으로 만드는 것은 상징주의와 실제의 현실, 그리고 꿈결과 rxk은 화면과 장식적인 요소들간의 결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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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히트의 여인들>

1891년 4월 폴 고갱은 타히티를 향해 떠낫다. 그를 먼 곳까지 떠나게 만든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문명사회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전망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갱은 그가 브르타뉴와 프랑스 남부에 체류하면서 구하고자 했던 것을 바로 타히티에서 발견했다.

유럽을 지배하던 부르주아의 규범들로부터 벗어나 있는, 본능적이고 원시적인 사회에 대한 꿈은 당대의 많은 화가들이 공유하고 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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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레아레아>

타히티의 여인들은 고갱의 새로운 뮤즈가 되었고, 육체적인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의 신비스런 조화라는 화가의 이상을 완벽하게 실현시켜 주었다. 고갱은 자신만의 독특한 필치로 다채로운 색의 파레오를 걸친 채 자연스러운 포즈로 앉아 있는 여인들을 묘사했다. 그들의 모습에서는 불교 사원의 조각이나 고대 이집트 예술로부터의 영향이 나타난다.

고갱은 원시적인 단순함 속에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들과 상징들, 그리고 작품에 대해 명확한 해석의 열쇠를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혼동을 불러일으킬만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들을 숨겨놓았다. 따라서 당시 대다수의 비평가들은 고갱이 제시한 새로운 예술세계를 받아들이지 못했으며, 스트린드베리는 고갱에게 본낸 편지에서 “당신의 낙원에 있는 이브는 내 타입이 아닙니다.”라고 기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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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안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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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그림들2010. 2. 9. 15:18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1840. 11.14. ~ 1926.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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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시절을 르아브르에서 보냈으며, 그곳에서 화가 으젠느 부댕에게 외광묘사에 대한  화법을 배웠다. 르누아르, 시슬레, 바지유 등과 공부했고 초기에는 마네 영향을 받아 인물화를 그렸으나 점차 풍경화를 그렸다. 파리 근교에 살면서 세느 강변의 밝은 풍경을 통해 인상파 양식을 개척했다. 1874년 [인상-일출]을 선보인후 인상파란 이름이 모네를 중심으로한 화가집단에 붙여졌다. 이후 8회 계속된 인상파전에많은 작품을 출품하여 인상주의의 대표적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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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라자르 역>

샤를 보들레르는 “파리는 사람의 마음보다 더빨리 변한다.”고 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파리의 생명력은 인상주의 회화에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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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

바티뇰의 생라자르 역은 파리의 근대성을 상징하는 곳이었다. 모네는 증기가 만들어내는 효과와 기관차가 도착할 때 플랫폼을 휘감는 대기의 분위기에 매료되었고, 섬세한 시선을 통해 유리와 철골 구조물로 건축된- 이는 당시 유행하던 건축 경향이었다- 생라자르 역의 모습을 화면에 포착했다.



모네는 증기의 변화하는 밝기와 색상을 적절한 색채 사용을 통해 완벽하게 화면에 표현해냈다.

보랏빛 색조는 노란색, 분홍색, 그리고 하늘색으로 점점 바뀌고 있으며, 연기로 가득한 대기의 모습을 마치 보는 이의 후각과 촉각마저 자극할 것처럼 완벽하게 재현했다.

모네는 희미한 보라색을 대기의 색상으로 생각했고, 이를 자신의 그림에서 표면을 얇게 덮고 있는 코팅제와 같이 사용했다.



배경에는 독특한 파리 시내 건물들의 모습이 보인다. 나폴레옹 3세는 오스만 남작에게 도시 개조를 위림했고, 당시 파리 시내는 개조 작업이 막 끝난 상태였다. 오스만은 특히 민중들이 다시 봉기했을 때를 대비하여 바리케이드를 치기에 적합한 좁은 골목을 평평한 대로로 바꾸는 작업에 열중하였다.



에밀 졸라는 “마치 이전 시대의 화가들이 숲과 강에서 사상을 찾았던 것 처럼, 오늘날의 화가들은 기차역에서 그것을 찾아야만 한다.”라고 기술했다.
파리는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했으며, 기차역의 역동적인 대기는 모네에게 짧은 순간의 모습, 즉 인상을 화폭에 옮기기에 덩벗이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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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양귀비꽃>

오래전부터 모네와 바지유는 같은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살롱에서 여러 번 낙선한 뒤, 사재를 털어 그들처럼 전시회를 기획했다. 1873년 12월27일 예술가 협회가 탄생하였고, 이듬해 4월 첫 번째 전시회를 열었다. <개양귀비꽃/아를장뙤이유의양귀비> 역시 이때 전시된 작품들 중 하나이다. 이 유명한 작품 속에서 모네는 모임의 친구들과 자주 찾던 아를장뙤유 주변의 개양귀비꽃이 만발한 들판을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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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안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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