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는 안견, 정선, 장승업과 함께 조선의 4대화가로 꼽혀요. 김홍도는 젊어서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웠는데, 강세황은 자신의 글을 모은 <표암유고>에 <단원기>를 기록할 정도로 김홍도를 아꼈습니다.
김홍도는 뛰어난 그림 솜씨로 도화서 화원이 된 뒤 1781년과 1791녀에 정조 임금의 어진을 그리기도 했어요. 그는 정조의 총애를 받아 벼슬살이도 했는데,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도 계속 여러 종류의 그림들을 많이 그렸습니다.
김홍도는
산수화 외에도 인물화, 신선화, 불화등 거의 모든 분야의 그림을 잘 그렸지만, 특히 풍속화에 뛰어났습니다. 그는 서민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물론이고, 생활 풍습, 놀이 등을 소재로 많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김홍도는 주변 배경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인물의 자세와 동작, 익살스러운 얼굴 표정을 통해 그 당시의 사회를 재치 있게 풍자했습니다. 김홍도의
풍속화는 그 시대 사람들의 정서를 한국적인 해학을 곁들어 생생하게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래서 김홍도를 풍속화의 대가라고 합니다.
김홍도의 그림 대부분은 그동안 조선 풍속화에서 잘 사용하지 않았던 원형구도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원형 구도는 가운데로 향하는 시선을 사로잡으면서 안정감을 느끼게 해줍니다. 아울러 시원하게 여백을 남겨 놓아 공간이 더욱 넓어 보이는 효과를 줍니다.
김홍도가 활동하던 영조와 정조 시대에는 서민들의 생활이 예전보다 훨씬 안정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김홍도의 풍속화에는 사회 모순에 대한 은근하 풍자는 잇자만, 그림 안에 신분 간의 갈등이나 대립을 나타내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김홍도가 해학과 중용의 눈으로 모두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윤복의 호는 혜원으로, 김홍도, 김득신과 함께 조선 시대 3대 풍속화가로 꼽힙니다. 김홍도가 조선 후기 풍속화의 최고 경지를 이루었다면, 신윤복은 여성 풍속화의 다양성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신윤복은 산수화와 영모화도 잘 그렸습니다.
신윤복이 어디서 태어나고 어떻게 자랐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단지 김홍도보다는 후배 화원이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신윤복의 집안은 대대로 화원 출신이 많았는데, 그의 할아버지와 삼촌을 비롯해 아버지 신한평도 화원이었습니다.
신윤복은
그림을 통해 당시 양반 사회의 풍류와 멋, 사치와 방종을 표혀했습니다. 그는 특히 여성들의 모습을 잘 그렸는데, 주로 천대 받았던 기녀, 무녀 같은 여성들을 많이 그렸습니다. 그의 화풍은 후대 회화에 많은 영향을 미쳐 작가를 알 수 없는 풍속화나 민화 등에서 그의 화풍을 따른 작품이 많습니다.
신윤복은 먼저 윤곽선을 그린 뒤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한 굵기의 선을 그리는 방법을 철선묘법이라고 하는데 신윤복이 주로 사용했던 화법입니다. 선을 일정하게 내리 그어서인지 그림의 분위는 한층 더 단아해 보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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