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그림들2010. 2. 12.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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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팡탱라투르 (Henri Fantin-Latour, 1836년 1월 14일 ~ 1904년 8월 25일) 는 프랑스 화가이다. 아버지로부터 그림의 기초를 배웠다. 처음에는 쿠르베에게 마음이 끌렸으나, 마네의 작품을 알고 게르보아의 집회에도 출석을 했다. 인상파에는 참가하지 않지만, 작품은 명암을 깊게 하여 정확히 신중한 묘사를 하고 있다. 작품에는 〈바티뇰의 화실〉(1870년), 〈들라크루아 예찬〉(1864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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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탱 라투르는 들라크루아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들라크루아에 대한 경의>를 제작한 바 있다. 그 후에 그려진 <바티뇰의 아틀리에>팡탱 라투르의 집단 초상화 중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들라크루아에 대한 경의>와 마찬가지로, 팡탱 라투르는 이 작품을 통해 생존해 있지만 인지도가 높지 않았던 또 한명의 거장, 마네에 대한 경의를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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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밭 위의 점심식사> <올랭피아>를 그린 화가이며 언제나 살롱에서 벌어진 스캔들의 중심에 서 있었던 마네는 이젤 앞에 앉아 모델에게 시선을 돌린 모습으로 등장한다. 모델은 마네의 친구이며, 문학가이자 예술가였던 자키리 아스트뤽이며, 그 주위에는 당시 잘 알려져 있던 인물들, 즉 오토 숄 더러, 오귀스트 르누아르(그의 얼굴은 벽에 걸린 빈 액자 속에 들어가 있다), 에밀 졸라, 에드몽 매트르, 프레데릭 바지유, 그리고 클로드 모네가 마네게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 팡탱 라투르는 여러 등장인물들의 시선과 행동을 통해 그들의 특징과 개성을 정확히 표현해냈다. 이들은 당시 파리에서 가장 겆뉘적인 집단이었던 카페 게르보아의 멤버들이었다.
<마리 욜란드 드 핏츠 제임스>

<들라크루아에 대한 경의>와 다르게 이 작품에서 팡탱 라투르는 화면 속에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 넣지 않았고, 그림으로써 카페 게르보아와 자신과의 거리를 표현했다. 비판의 목소리가 있긴 했지만 어쨌든 작품은 1870년 살롱에 전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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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안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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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그림들2010. 2. 8. 15:43


“당신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고 큰 소리로 얘기하십시오.” 졸라는 마네에게 격앙된 어조로 편지를 썻다.

“당신은 경탄할만한 방법으로 위대한 작품을 창조하였으며 열정적으로, 그리고 혁신적인 기법으로 빛과 그늘의 진실, 사물과 피조물의 실체를 표현했습니다.”



소설가 에밀 졸라는 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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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아르 마네의 작품을 여러 차례, 공공연히 옹호하였으며, 당시 비평가와 대중들에게 혹평을 받았던 <올랭피아>와 <피리 부는 소년>에 찬사를 보냈다. 마네는 졸라가 보여준 우정과 이해에 대한 보답으로 이 유명한 작품을 제작했다.
졸라는 책상 앞에서 앉아 허공을 응시하고 있으며 그의 손에는 책이 한 권 펼쳐져 있다. 그가 문학가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은 무표정한 얼굴이나 정적인 포즈가 아니라 그를 둘러 싸고 있는 주변의 사물들이다. 화면 속에는 여러 책과 소책자들이 무심하게 흩어져 있고 에밀 졸라가 마네를 옹호하기 위해 쓴 팸플릿과 함께 벽에는 마네의 <올랭피아>가 걸려 있다.


<에밀 졸라의 초상> 1968년_에두아르 마네

마네의 명작 옆에는 일본판화 한 점과 벨라스케스 작품의 사본이 보인다. 이 세 작품들은 졸라가 자신의 글을 통해 피력했던 마네의 예술론에 대한 해석을 상징한다. 여러 가지 사실들을 종합해 볼때, 이 그림은 단순한 초상화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은 예술적인 교감을 나누었던 졸라에 대한 오마주인 동시에 그의 친구 졸라의 이상을 통해 표현한 마네 자신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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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지 안쪽 옆에 있는 줄무늬가 인물의 편화 현상을 가져온다. 피리부는 소년은 검은 색 윤곽으로 둘러싸여 배경에서 따로 떨어져 나온 듯하다. 단순한 구성과 이차원적인 화면으로 인해 그림은 마치 트럼프 카드 혹은 에피날 이미지(19세기 성행했던 채색판화)같아 보인다.

<올랭피아>가 야기한 스캔들로 인해, 1886년 살롱의 심사인단은 <피리 부는 소년>을 낙선시키기로 결정했다. <피리 부는 소년>은 마네가 스페인 여행에서 돌아온 후 벨라스케스와 고야의 작품을 모델로 하여 제작한 것으로 마네의 작품 중에도 걸작으로 손꼽힌다.






<피리 부는 소년>
1866년_에두아르 마네


작품의 모델은 마네의 친구인 르조슨 사령관이 그에게 데려온 황제친위대의 피리 부는 소년이다. 모델이 나이가 어린 소년이고 화면구성이 매우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마네는 커다란 크기의 화폭에 마치 공식 초상화를 그리듯이 주제를 표현해냈다. 사실적으로 생생하게 묘사된 소년은 화면 중앙에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으며, 색채의 표현 역시 단순화되어, 모자 위의 노란색을 제외하고는 전적으로 붉은색,검은색, 그리고 흰색의 대비 효과에 의존한다. 종종 트럼프 카드와 비교되곤 하는 이차원적 이미지에 깊이감을 부여하는 것은 소년의 발 아래에 생기는 그림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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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언의 사형 집행> 에두아르 마네

위대한 스페인의 회화 전통 이외에 이미지의 편화에 영향을 준 중요한 요인으로 지적되는 것은 바로 일본미술이다. 일본판화의 선형적 도안은 당대의 화가들에게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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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밭 위의 점심> 1863년 에두아르 마네

1863년 살롱의 심사는 대단히 엄격했다. 출품된 작품의 3/4이 거절당했고, 황제 나폴레옹 3세는 이 작품들에 대해 따로 ‘낙선전’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낙선전에 전시된 작품들 중에는 제임스 맥닐 휘슬러, 앙리 팡탱 라투르, 그리고 에두아르 마네의 작품들이 속해 있었고, 엄청난 스캔들을 불러일으킨 이 <풀밭 위의 점심식사> 역시 이 작품들 가운데 하나였다. 티치아노의 <전원음악회>와 라파엘로의 <파리스의 심판>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제작된 <풀밭 위의 점심식사>에는 화면 뒤쪽의 여인을 제외하고 두 명의 남성과(이들 중 한명이 마네의 동생 외젠이다.) 그가 아끼던 모델 빅토린 뫼랑이 등장한다.

마네의 작품이 갖고 있는 탁월함과 진보적 성격을 알아볼 수 없었던 비평가와 대중들은 작품이 불경스럽고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화면 속 두남자가 입은 옷은 당시 유행하던 스타일이었지만, 당시 분위기는 도저히 이 작품을 용납할 수 없었다. 마네는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제작하는 동안 이 작품이 이토록 커다란 스캔들에 휩싸이리라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16세기 거장들의 작품을 모티브로하여, 고전과 근대가 공존하는 작품을 창조하려 했을 뿐이었다.

화면 속 인물들의 포즈는 라파엘로의 <파리스의 심판>을 묘사하여 제작한 마르킨토니오 라이몬디의 판화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나 마네가 진정한 모델로 생각했던 것은 16세기 베네치아 거장들의 작품, 그중에서도 특히 티치아노의 <전원음악회>였다.

마네는 부지런히 루브르를 드나들며 오래된 거장들의 작품에 대해 연구했다.

여인은 관객을 바라보며, 마치 관객들에게 도전하는 듯 보인다. 흔들림 없는 그녀의 시선에서 나체로 있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은 찾아 봇 수 없다. 이와 같은 여인의 모습은 작품을 둘러싸고 일어난 스캔들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고대의 언어를 근대의 문법으로 풀어낸 마네의 능력과, 이 작품의 탁월함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에두아르 마네는 정물의 ‘회화의 시금석’, 즉 훌륭한 화가가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 가야 할 시험대라고 생각했다. 빅토린의 옷 위에서 쏟아져 불밭 위로 흩어진 식사의 흔적들, 즉 빵과 과일바구니, 물병에 대한 세부묘사는 정물화 장르에 대한 마네의 특별한 재능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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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랭피아> 1963년_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 식사>가 커다란 스캔들을 불러일으킨 후, 1865년 마네는 또 다시 이 강렬한 인상의 유화를 살롱에 출품했다. 마네의 <올랭피아>는 티치아노가 그린 비너스를 본 뜬 것으로, 마네가 이 작품을 <병사들에게 능욕당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롱에 출품한 것이, 비너스의 그림을 <가시면류관을 쓴 그리스도>와 께 칼 5세에게 바친 베네치아 화파의 거장 티치아노를 염두에 둔 것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당시 아카데미 취향의 누드화에 대한 마네의 반발이 드러난다. 이번에도 마네의 모델이 된 것은 빅토린 뫼랑이었다. 모델의 뚜렷한 개성, 편안한 포즈, 뻔뻔하고 오만한 시선, 전혀 이상화되지 않은 나체의 적나라함, 당시 유행하던 장신구는 보는 이로 하여금 작품 속이 상황이 마치 당대의 일인 것 처럼 느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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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올랭피아’는 창녀들이 가장 흔히 사용하던 예명이었으며, 게다가 여인의 발치에 있는 검은 고양이의 모습은 <올랭피아>를 대중과 비평가들에게 용서받지 못할 작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마네의 친구이자 지지자였던 에밀 졸라는 작품 <올랭피아>는 마네가 가진 화가로서의 재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밝은 색조와 어두운 색조를 적절히 배치하는 능력, 어두운 색조의 미묘한 뉘앙스를 자유자재로 표현하는 능력이 돋보인다. 그의 세련된 색채 구사는 배경의 색채 배합에서 정점에 이른다. 그림의 주인공에게 꽃다발을 건네는 흑인 여성이 검은색 배경으로부터 따로 떨어져 나온 듯 보이는 것은 이 같은 섬세한 색조의 차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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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도의 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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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그림들2009. 12. 22.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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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화가. 인상주의의 아버지로 불린다. 세련된 도시적 감각의 소유자로 주위의 활기 있는 현실을 예민하게 포착하는 필력에서는 유례 없는 화가였다. 종래의 어두운 화면에 밝음을 도입하는 등 전통과 혁신을 연결하는 중개역을 수행한 점에서 공적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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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위에 느긋하게 누워 우리를 지그시 쳐다보는 이 여자만큼 발표되었을때 큰 소동을 일으킨 작품은 서구미술사에서 거의 유례가 없다. 만약 있다면 마네가 1863년, 즉 이 <올랭피아>보다 2년 전에 낙선전에 출품한 <풀밭 위의 식사> 정도일 것이다. <올랭피아>는 <풀밭 위의 식사> 직후에 그려져서 1865년 상롱에 출품되었는데 당시 신문이나 비평은 모두 이 천박하고 뻔뻔스러운 작품에 조롱과 공격을 퍼부었다. 배가 누런 창녀라든가 인도산 고무로 만든 암컷 고릴라라든가 출산을 앞둔 부인과 양가의 자녀들은 아무쪼록 피해서 지나가야 할 작품과 같은 문구가 줄줄이 뒤를 이어 저널리즘의 지면을 흔들었다. <풀밭 위의 식사> 때에는 마네에게 비교적 호의적이었던 쿠르베마저 금방 목욕을 마친 스페이드의 여왕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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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여자 그림이라면 르네상스 이래로 수도 없이 그려져 왔고 당시 루브르에도 얼마든지 걸려 있었다. 침대 위에 가로누운 포즈가 너무 대답하다는 것도 이우가 되지 못한다. 예컨대 <올랭피아> 보다 반세기도 더 전에 그려진 고야의 <벌거벗은 마하>가 이것보다도 조신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찍부터 스페인 회화에 빠져 있던 마네는 물론 이 작품을 그릴 때 틀림없이 고야를 의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 그것보다도 이 모티프 자체는 마네가 처음 생각해 낸 것도 아니고 분명히 훌륭한 선례가 있다. 현재 피렌테의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티치아노의 명작 <우르비노의 비너스>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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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그토록 소동이 일어났다는 것은 이 작품이 가진 특질과 역사적 의미를 잘 말해 준다고 생각된다. 100년 전 사람들은 예술을 보는 눈이 없었다든가 예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고 단언해 버리면 간단하고, 그러한 소동은 예술과는 관계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지만, 그러나 <올랭피아>의 경우는 반드시 그것으로 끝난다고 할 수 없다. 당시 저널리즘의 수 많은 문구나 전람회장에서의 소동과 같은 사건들을 모두 잊어버리고 모든 선입견을 버리고 바라보더라도 <올랭피아>에는 당장이라도 무너지려고 하는, 즉 장대하고 화려한 건축을 최후의 한 점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듯한 긴장감과 불안감이 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당시 사람들이 그녀에게 퍼부었던 비난에 대해 거의 공감 비슷한 것마저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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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사람들은 <올랭피아>가 자기들과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파리의 여자라는 것을 깨달았을 뿐더러 아가 <풀밭 위의 식사>의 뻔뻔스러운 여자와 같은 인물이라는 것도 알아챘다. 물론 마네 자신도 그것을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이 두 작품의 모델은 빅토린 뫼랑이라는 젊은 여인이며 마네가 파의 카르티에라탕(학생가)을 걷다가 우연히 보도 모델로 서도록 부탁했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마네의 마음에 드는 모델이어서 이 두 걸작 이외에 1860년대 마네의 작품에 동종 등장한다. 마네는 그 모델을 이상화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분명히 알아볼수 있는 모습 그대로 그렸다. 그것이 사람들이 분격에 한층 기름을 붓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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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올랭피아>는 스페이드의 여왕과 같이, 예컨대 트럼프 카드의 그림처럼 명확한 윤곽선과 평탄한 색면으로 되어 있다. <올랭피아>의 기초가 된 <우르비노의 비너스>와 비교해 보면 구도상의 유사성과 더불어 표현상의 차이도 분명히 알아볼수 있다. 한마디로 마네의 작품에서는 깊이를 부정하고 이차원의 평면성을 강조하려는 경향이 보인다. 예를 들어 티치아노의 그림에서는 배경 오른쪽 뒤편의 바닥 무의가 원근법에 의해 그려져 있는 데 비해 마네의 그림에서는 아무 무늬도 없는 밑칠로 바뀌어 있다. 또 나부의 신체에서도 두 작품은 거의 같으면서도 미묘한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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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이차원적 표현은 대상의 깊이나 두께, 둥글음을 나타내려고 했던 그네상스 이래 서구의 사실주의적 표현과 정반대 된다. 마사초 이래로 아니, 훨씬 거슬러 올라가 조토 이래로 서구의 회화는 이차원의 화면에 어떻게든 삼차원의 현실 세계를 표현하려는 노력을 거듭해 왔다. 원근법이라든가 명암이라든가 살붙이기라는 전통적인 기법은 사실적 표현을 위해 서구 회화가 만들어 낸 무기다. 그런데 쿠르베조차 의심한 적이 없던 그 전통적인 기법이 여기에서는 거의 전면적으로 부정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마네는 애초부터 삼차원의 세계를 화면에 구축하는 것 따위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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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 마네는 19세기 회화를 근대 회화의 방향으로 크게 밀어붙인 혁신자였다. 마네 이후 회화의 역사는 그 이전과 분명히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마네가 수행한 역사적 역할이 쿠르베의 역할보다 훨씬 컸다고 할 수 있다. 쿠르베는 시민 사회에 대한 반역자이고 혁명적 사상가이기는 했지만 혁명적인 화가는 아니었다. 쿠르베의 작품에서는 전 통적인 표현이 그래도 살아 있다. 그러나 마네의 작품은 분명히 전통과의 단절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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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를 자처한 쿠르베보다 신민 사회 속에서 자기의 지위를 가지려 했던 마네 쪽이 결과적으로 한층 더 혁명적이었다는 것은 조금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역사라는 것은 종종 그러한 역설에 의해 전개된다. 사실 쿠르베가 철저한 약인이었던 데 비해 마네는 세련된 도회 사람이며 사교계와 상류 시민 계급과의 교제를 즐기고 외출할 때는 언제난 구석석 차람새에 신경을 쓰는 멋쟁이였다. 살롱에 제출한 그림이 거부되자 쿠르베는 마침 잘 되었다는 듯이 자기의 혁신성을 주장했지만 마네는 진심으로 낙담했다. 마네는 기질적으로는 오히려 보수적이고 시시민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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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마네가 일단 캔버스를 향하자 쿠르베도 하지 못한 대담한 혁신을 이루어냈다. 마네 이후 근대 회화가 <올랭피아>에 의해 암시된 방향, 즉 삼차원적 표현의 부정과 평명성의 강조라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은 잘 알려져 있는 대로다. 마네 자신은 아마도 자신의 작품의 지닌 역사적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화가 마네는 그토록 혁신적이었으나 인간 마네는 그토록 보수적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마네는 천재의 희생자였다고 할 수도 있다. 사실 그 때문에, 그는 자기가 들어가고 싶어하던 사회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는 대사를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마네는 역사상 불후의 영예를 얻게 되었다. 19세기 후반에 시작되는 그대 회화의 역사는 그것을 분명히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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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안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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