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그림들2010. 2. 25. 15:01


 프로이센, 인상파, 에밀졸라, 엑상프로방스, 에콜드보자르, 르누아르, 폴, 폴 세잔
폴 세잔(Paul Cézanne, 1839년 1월 19일 - 1909년 10월 22일)은 프랑스의 대표적 화가로서 현대 미술의 아버지이다.
세잔은 1839년 프랑스 남쪽 끝에 있는 엑상 프로방스(Aix-en-Provence)에서 은행가 루이 오귀스트 세잔 (Luis August Cézanne) 과 미혼녀 엘리자베드 오베르 (Elisabeth Aubert)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향의 기숙사 국민학교 상 조셉을 나온 후 고등학교 부르봉을 다니면서 소설가 에밀 졸라와 사귀게 된다. 졸업 후 인근에 사는 화가들을 자주 방문하면서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다. 하지만 아버지의 극성적인 반대로 포기를 하였다가 대학을 중퇴하고 고향에 돌아온 이후 아버지의 은행에서 일을 했으나, 졸라의 권유와 어머니의 아버지에 대한 설득으로, 다시 미술 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해서 22세 때 파리로 나가 그림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에콜 드 보자르에 입학시험에 떨어진 후, 혼자서 독학을 했다. 파리에서 기오망·피사로·모네·드가·르누아르 등 인상파 화가들과 사귀었다. 그동안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과 도시 생활에 싫증을 느껴 여러 번 시골에 내려가 있기도 하였다. 1882년 대망의 관전(官展)에 입선하고 1895년 개인전을 개최하여 점차 주목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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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세잔은 1839년 엑상프로방스에서 태어났다. 학창시절 세잔은 에밀 졸라와 친우 관계였으며, 그 이후로도 졸라는 세잔에게 문화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세잔은 졸라를 따라 파리로 갔으나, 예술가 사회에 속하지 못한채, 전위적인 노선의 화가들로부터 의혹과 적의어린 시선을 받아야 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그는 점점 더 괴팍하고 까다로운 성격을 갖게 되었고, 대단히 근대적이었던 그의 회화 양식 역시 특정한 예술 운동의 범주에 속한다고 말하기 어렵게 되었다.

세잔은 카미유 피사로와 대단히 친밀한 관계에 있었으며, 인상주의 전시회에 두차례나 참여했지만, 그가 인상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였는지의 여부는 미지수이다. 이 작품에서 세잔이 묘사한 인물은 어린시절부터 그의 친구였던 불운의 화가, 아실 앙프레르다. 왜소증을 앓았던 앙프레르는 자신의 키보다 지나치게 높고 커다란 의자 위에 앉은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그의 왜소한 신체를 둘러싸고 있는 의자는 거의 옥좌와 같이 보인다. 세잔은 공식 초상화와 같이 엄숙한 분위기의 화면을 연출하려 했다. 기형일뿐더러 비례에 맞지 않는 앙프레르의 신체는 이처럼 이상화된 표현을 배제한 채 묘사되었고, 이로 인하여 느껴지는 숭고함은 보는 이를 숙연하게 만든다. 한편 화면에 나타나는 자신감 넘치는 붓놀림과 색채의 선택의 훗날의 진보를 예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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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 같은 정신력을 소유한 열정적인 영혼, 불구의 신체 속에 깃든 강한 자부심, 뒤틀어진 난로 속에서 타오르는 천부적 재능의 불꽃.” 폴 세잔은 앙프레르를 이와 같이 회고했다.
세잔의 친구였던 앙프레르는 기형적인 신체를 가졌지만 우아하고 세련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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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그림들2010. 2. 12.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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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팡탱라투르 (Henri Fantin-Latour, 1836년 1월 14일 ~ 1904년 8월 25일) 는 프랑스 화가이다. 아버지로부터 그림의 기초를 배웠다. 처음에는 쿠르베에게 마음이 끌렸으나, 마네의 작품을 알고 게르보아의 집회에도 출석을 했다. 인상파에는 참가하지 않지만, 작품은 명암을 깊게 하여 정확히 신중한 묘사를 하고 있다. 작품에는 〈바티뇰의 화실〉(1870년), 〈들라크루아 예찬〉(1864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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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탱 라투르는 들라크루아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들라크루아에 대한 경의>를 제작한 바 있다. 그 후에 그려진 <바티뇰의 아틀리에>팡탱 라투르의 집단 초상화 중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들라크루아에 대한 경의>와 마찬가지로, 팡탱 라투르는 이 작품을 통해 생존해 있지만 인지도가 높지 않았던 또 한명의 거장, 마네에 대한 경의를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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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밭 위의 점심식사> <올랭피아>를 그린 화가이며 언제나 살롱에서 벌어진 스캔들의 중심에 서 있었던 마네는 이젤 앞에 앉아 모델에게 시선을 돌린 모습으로 등장한다. 모델은 마네의 친구이며, 문학가이자 예술가였던 자키리 아스트뤽이며, 그 주위에는 당시 잘 알려져 있던 인물들, 즉 오토 숄 더러, 오귀스트 르누아르(그의 얼굴은 벽에 걸린 빈 액자 속에 들어가 있다), 에밀 졸라, 에드몽 매트르, 프레데릭 바지유, 그리고 클로드 모네가 마네게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 팡탱 라투르는 여러 등장인물들의 시선과 행동을 통해 그들의 특징과 개성을 정확히 표현해냈다. 이들은 당시 파리에서 가장 겆뉘적인 집단이었던 카페 게르보아의 멤버들이었다.
<마리 욜란드 드 핏츠 제임스>

<들라크루아에 대한 경의>와 다르게 이 작품에서 팡탱 라투르는 화면 속에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 넣지 않았고, 그림으로써 카페 게르보아와 자신과의 거리를 표현했다. 비판의 목소리가 있긴 했지만 어쨌든 작품은 1870년 살롱에 전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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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그림들2010. 2. 11.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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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앙리 폴 고갱(Eugène Henri Paul Gauguin, 1848년 6월 7일 ~ 1903년 5월 8일)은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이다. 파리에서 태어났다.

고갱의 생애는 파란만장하다. 아버지는 자유주의자로서 망명하여 남미 리마로 가던 도중에 죽고, 그후 고갱은 7세 때에 고국에 돌아온다. 바다를 동경하여 선원이 되어 남미도 항해하지만, 결국 포기하고 증권 거래소에서 일했다.
 
거기서 돈을 모아 결혼하여 평화로운 생활이 계속되었으나 여가가 있을 때마다 회화에 전력하여 살롱 전에 입선하였다. 피사로를 알게 되어 인상파의 영향을 받은 후, 인상파 작품을 사들이고, 그 화가들과도 교제하여 1880년 제5회 전시회부터 인상전(印象展)에 그의 회화를 출품한다. 이어 회화에 대한 정열은 더욱더 왕성해져서 1883년에는 증권거래소를 그만두고 화가로서 새출발을 한다.

그러나 회화는 생활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돈은 다 떨어져서 아내의 고향인 덴마크로 가는데 덴마크에서 발표한 일도 실패, 고갱은 처자를 남겨두고 단 하나의 어린아이를 데리고 파리에 나타났다. 그러나 생활은 궁핍하여 포스터를 붙이는 노동도 했다. 그리고 1886년부터 브르타뉴의 퐁 타뱅으로 가서 젊은 화가들과 만나, 인상파의 그림에 만족하지 않고, 독자적인 화풍을 창시, 평면적인 채색으로 장식적인 그림을 그리면서, 그의 화풍을 따르는 젊은 화가들과 '퐁 타벵(Pont-Aven) 파'를 창립하였다.

파리로 돌아가서는 고흐를 만났다. 그러나 고갱에게는 미개국에 대한 정열이 있었다. 문명의 허위도 좋아하지 않았다. 원시 속에는 꿈이 있다. 거기에는 시(詩)가 살아 있다. 고갱은 1887년 봄에 남미로 건너가고, 다시 마르티니크 섬으로 가지만 병으로 인한 고뇌로 귀국한다. 그리하여 이듬해 퐁 타뱅으로 다시 가 거기에서 젊은 화가들과 만나 새로운 회화의 이론을 주장한다.

이어 고흐의 초대로 아를르에도 가지만 그 우정은 깨져 버려, 재차 미개척의 땅을 그리워한다. 그 염원을 달성한 것은 1891년으로, 고갱은 태평양의 타히티 섬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 남방의 색채와 미개한 생활은 그리던 땅에 잘 맞고, 그는 그 감동에서 수많은 작품을 그려 낸다. 고갱은 한번 파리에 돌아오지만, 1895년에는 최종적으로 타히티에 돌아간다. 그러나 그림 제작하는 것 외에는 궁핍과 병과 싸우는 생활이고, 1901년에는 도미니카 섬으로 옮겨 가서 고독한 생애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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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

영원히 유럽을 떠나 태평양의 섬으로 돌아가버린 고갱은 1905년 그곳에서 5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그는 이미 심각한 병을 앓고 있는 상태였다. 알코올 남용은 그의 심장질환과 피부발진을 악화시켰으며, 여기에 매독까지 겹쳤다. 이처럼 좋지 않은 건강 상태에도 불구하고 만년에 이르기까지 그의 왕성한 창조력은 멈추지 않았다.

1898년부터 1900년 사이 그는 파페에테에서 여러 점의 걸작을 탄생시켰는데, <백마> 역시 이 시기에 그려진 작품이다. <백마>는 한 약사의 주문으로 그려졌는데, 작품이 완성되고 난 후 주문자는 색채가 반자연주의적이라는 이유로 작품 구입을 거부하였다.(무엇보다 그는 화면 앞쪽의 말이 초록색으로 그려진 것에 대해 불평을 늘어 놓았다.)고갱의 양식은 당시 유럽 대중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때문에 그는 작품 판매로 인한 수입을 전혀 얻을 수가 없었다.

<백마>의 단순화된 구성 속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이고 상징적인 요소들이 숨겨져 있는데, 예를들어 화면 속에 그려진 말의 모습은 파르테논의 프리즈 장식과, 고갱이 자주 인용했던 그림인 뒤러의 판화 <죽음과 악마의 기사>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고갱의 원시적인 회화 양식은 오랜 기간 동안의 연구를 통해 얻어진 것이며, <백마>를 그리던 시기에는 이미 완숙의 경지에 이른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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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위에 탄 인물은 이미 고객에게 가까이 다가와 있던 ‘죽음 저편으로의 여정’을 상징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은 여전히 창조적인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그림과 같이 고갱이 그린 인물들에게서는 그가 브르타뉴와 대 양 저편에서 구하고자 했던 야생적이고 원시적인 숭고함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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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주문자가 크게 불평을 늘어놓았던, 화면 앞쪽에 있는 말의 푸른색 털은 고갱이 자연 그대로의 색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낸다.

고갱은 현실을 재현하는 수단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 생각, 심리, 상태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색채를 사용했고, 이는 새로운 양식, 즉 표현주의와 추상주의를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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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앞쪽에 있는 꽃의 모습에는 원근법적인 구도가 결여되어 있다. 고갱은 평면적인 배경에 순색의 색채를 칠하고 타히티의 전통 의상 파레오를 연상시키는 장식적인 곡선을 사용함으로써, 이와 같은 이차원적 이미지를 부각시킨다. 고갱의 작품을 더욱 매혹적으로 만드는 것은 상징주의와 실제의 현실, 그리고 꿈결과 rxk은 화면과 장식적인 요소들간의 결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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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히트의 여인들>

1891년 4월 폴 고갱은 타히티를 향해 떠낫다. 그를 먼 곳까지 떠나게 만든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문명사회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전망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갱은 그가 브르타뉴와 프랑스 남부에 체류하면서 구하고자 했던 것을 바로 타히티에서 발견했다.

유럽을 지배하던 부르주아의 규범들로부터 벗어나 있는, 본능적이고 원시적인 사회에 대한 꿈은 당대의 많은 화가들이 공유하고 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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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레아레아>

타히티의 여인들은 고갱의 새로운 뮤즈가 되었고, 육체적인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의 신비스런 조화라는 화가의 이상을 완벽하게 실현시켜 주었다. 고갱은 자신만의 독특한 필치로 다채로운 색의 파레오를 걸친 채 자연스러운 포즈로 앉아 있는 여인들을 묘사했다. 그들의 모습에서는 불교 사원의 조각이나 고대 이집트 예술로부터의 영향이 나타난다.

고갱은 원시적인 단순함 속에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들과 상징들, 그리고 작품에 대해 명확한 해석의 열쇠를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혼동을 불러일으킬만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들을 숨겨놓았다. 따라서 당시 대다수의 비평가들은 고갱이 제시한 새로운 예술세계를 받아들이지 못했으며, 스트린드베리는 고갱에게 본낸 편지에서 “당신의 낙원에 있는 이브는 내 타입이 아닙니다.”라고 기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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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그림들2010. 2. 11.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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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에밀-베노아 마티스(Heinri Émile-Benoit Matisse, 1869년 12월 31일 - 1954년 11월 3일)는 20세기 표현주의 프랑스 화가이다.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최대의 화가'로 일컬어진다. 프랑스 북부 노르파드칼레의 르샤토캄프레시스에서 태어났다. 22세 때 파리로 나가 그림 공부를 하고, 1893년 파리 국립 미술 학교에 들어가 구스타프 모로에게서 배웠다. 이 무렵 세잔·고흐·고갱에게 끌려 그들의 채색 방법에 강한 공감을 느꼈다. 1904년 무렵에 전부터 친분이 있는 피카소·드랭·블라맹크 등과 함께 20세기 회화의 제일보로 불리는 야수파 운동에 참가하여, 그 중심 인물로서 활약하였다. 1910년경부터 피카소 등의 입체파의 영향을 받아 엄격한 구성과 단순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독자적 화풍을 전개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후에는 주로 니스에 머무르면서, 모로코·타히티 섬을 여행하였다. 만년에는 색도 형체도 단순화 되었으며, 밝고 순수한 빛의 광휘와 청순 명쾌한 선에 의하여 훌륭하게 구성된 평면적인 화면은 '세기의 경이'라고까지 평가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착수하여 1951년에 완성한 반(Vannes) 예배당의 장식은 세계 화단의 새로운 기념물이다. 그는 조각·동판화에도 능하였고, 직물의 디자인, 삽화 등 새로운 분야도 개척하였다. 대표작으로 <춤> <젊은 선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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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사,평온 그리고 관능>

앙리 마티스<호사, 평온, 그리고 관능>은 오르세 미술관에서 가장 근대적인 작품이다. 그것은 제작 시기가 아니라, 양식의 혁신성에 관한 것이다. 작품 안에는 20세기 전반기의 예술적 경향을 특징짓는 아방가르드 예술의 분위기가 살아 숨 쉬고 있다. 마티스는 마네에서 퓌비 드 샤반에 이르기까지 19세기 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해안 풍경을 주제로 선택하여, 그것을 한 차원 더 근대적인 양식으로 표현해냈다.

이 작품은 점묘화법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이를 통해 마티스가 달성하고자 했던 목적은 이전의 화가들과 달랐다. 마티스의 말에 따르면, 회화는 단순히 ‘역사적 사건을 묘사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차원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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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 작업실>

그는 “회화란 화가의 내면적인 비전을 표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라고 생각했고, 더 이상 객관적인 현실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외부의 세계가 아닌 개인적인 감정, 정확히 말해 ‘내면적인 비전’에서부터 출발했다. 바야흐로 표현주의가 인상주의를 대체하기 시작한 것이다. 표현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마티스는 훗날 야수파로 잘 알려진 젊은 화가들의 모임을 조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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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소녀>


<호사,평온,그리고 관능>야수파의 탄생과 관련하여 특징적인 표현 양식을 보여준다. 장식적이고 조화로운 곡선을 작품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고, 실제 자연과는 달리 타는듯한 붉은 색채는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자 감정을 고양시키는 도구로써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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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이제 내면의 표현 언어, 즉 본능적이고 내면적이지만 동시에 다분히 계산적인 연구가 되었다. 그것은 마치 악보와 같은 색조의 병렬과 조화로 화면에 나타난다.

마티스의 초기 작품에서부터 선은 장식적이고 조화로우며 리드미컬한 곡선의 형태를 띠었고,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감정을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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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제목은 보들레르의 시에서 따온 것이지만, 작품의 테마는 ‘목욕하는 여인들이 등장하는 이상화된 풍경’으로, 전통 회화에서 자주 다루어왔던 주제였다.

19세기에 이르러 많은 화가들이 이와 같은 테마를 각기 다른 표현을 통해 작품화한 바 있다. 마티스 역시 이를 자신만의 독창적인 표현주의 양식으로, 여러 차례 다루었는데, 대표적인 작품으로 <호사>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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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칼자국 모양으로 칠해진 색채가 마치 모자이크를 연상시킨다. 이러한 기법은 점묘화법에서 착안한 것이지만, 마티스는 점묘화법의 이론적 한계를 뛰어 넘었다. 마티스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나는 색채를 통해 느낀다”,“나의 회화를 구성하는 것은 색채이다.”.“나는 회화를 채색된 평면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색채의 조합, 즉 표현적이고 구성적인 방법으로 파란색,빨간색,녹색을 조합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아무런 편견 없이 색을 칠한다. 나는 본능적으로 색채가 가진 표현성에 이끌린다. 내가 색채를 선택하는 것은 어떠한 과학적 이론이 아니라 나의 감정에 기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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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그림들2010. 2. 10.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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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빌럼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년 3월 30일 ~ 1890년 7월 29일)네덜란드 화가로 일반적으로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는 그의 작품 전부(900여 점의 그림들과 1100여 점의 습작들)를 정신질환(조울증으로 추측됨)을 앓고 자살을 감행하기 전의 단지 10년 동안에 모두 만들어냈다. 그는 그의 생존기간 동안에 거의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는 특히 1901년 3월 17일 (그가 죽은 지 11년 후) 파리에서 71점의 반 고흐의 그림을 전시한 이후에 그의 사후 명성은 급속도로 커졌다.

인상파, 야수파, 초기 추상화에 미친 반 고흐의 영향은 막대하고 20세기 예술의 여러 다른 관점에서 보일 수 있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은 반 고흐의 작품과 그의 동시대인들의 작품에 바쳐졌다. 네덜란드의 또다른 도시인 오테를로에 있는 크뢸러-뮐러 박물관도 상당히 많은 빈센트 반 고흐 그림의 수집을 보유하고 있다.

<아를에 있는 반 고흐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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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이 아를에 온다는 소식을 들은 고흐는 들뜬 마음으로 그를 맞이하기 위해 정성으레 방을 정돈했다. 바로 이 시기에 고흐는 <고흐의 방>의 첫 번째 버전을 그렸으며, 후에 짧은 기간 동안 고갱과 함께 노란 집에 살면서, 두 번째 버전을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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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강의 별밤>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된 <아를에 있는 반 고흐의 방>은 그가 어머니와 누이를 위해 그린 세 번째 버전으로, 고흐는 상상 자신의 작품 중 가장 뛰어난 것을 복제하여 어머니와 누이에게 보내곤 했었다. 세 번째 버전을 그릴 때 고흐는 프로방스의 생 레미에 있는 생폴 드 모솔 정신병원에 입원 주이었다. 동거기간 중 고흐는 고갱격렬한 논쟁을 벌였는데, 이러한 갈등은 고흐의 귀를 자르는 발작으로까지 이어졌으며, 결국 두 화가를 결별에 이르게 만들었다. 이 사건 이후 고흐는 자신의 병을 깨닫고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 것이다.



고흐는 고갱이 떠나버린 것에 대해 대수롭지 않은 일인 듯 처신했으며, 그가 떠나게 된 이유가 사교적이지 못한 자신의 성격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를에 있는 고흐의 방>은 고흐가 아를에서 고갱과 함께 보낸 행복한 시절을 추억하며 그린 것이다.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그림을 보면서 마음의 안식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가구의 크기 또한 온전한 안식을 표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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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빛나는 밤>

고흐에게 있어 형태와 색채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도구, 즉 타인들과 소통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도구이자 자신의 마음 상태를 드러내는 도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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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심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지는 빈 의자는 반 고희의 작품에 흔히 등장하는 테마였다. 이 작품에서는 고갱이 아를을 떠난 후, 고흐가 느꼈던 외로움과 절망에 대한 상징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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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는 1853년 네덜란드의 그로트 춘데르트에서 태어났으며, 화구상의 점원으로 일하다가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목사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후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하며 뒤늦게 화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또한 그는 파리의 생활에 싫증을 느끼고 아를로 향했고, 그곳에서 수 많은 명작들을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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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는 “화면의 전체적인 구성과 각각의 사물들은 평온한 인상을 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라고 했지만, 사실 왜곡된 선과 형태, 그리고 색채의 사용에서는 화가의 불안과 근심이 느껴진다.

 



<더 많은 그림을 보시려면>

Posted by 이안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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