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그림들2010. 2. 12.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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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데지레 귀스타브 쿠르베 (Jean-Désiré Gustave Courbet, 1819년 6월 15일 - 1877년 12월 31일)는 19세기 프랑스의 사실주의 화가이다.

쿠르베는 1819년 프랑스 프랑슈콩테 주 오르낭 시에서 부유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다. 고향에서 중등학교 (Collège)를 나온 후, 1837년 브장송(Besançon)의 왕립 고등학교 (Lycée)에 입학함과 동시에 근교에 있는 사립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배우다. 리세 졸업 후 1840년 쿠르베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할 계획으로 파리로 가다. 그러나 곧 법학 수업을 포기하고 그림 그리기에 전념하여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1847년 네덜란드를 여행한 후, 렘브란트의 화풍, 베네치아화파 그리고 에스파냐 화풍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 분석하다. 1850년을 전후로 하여 쿠르베는 자신의 고유한 화풍인 사실주의 색채를 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의 철저한 사실주의는 천사를 그리라는 주문에 "천사를 실제로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릴 수 없다"라고 딱 잘라 거절했다는 일화에 잘 나타나 있다.


<세기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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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의 구성은 나체 여성인 익명성을 강조하고 있다. 당시의 관객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겼던 인위적인 그러나 대단히 사실적인 모습의 나체는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지만, 동시에 흰 옷가지가 여인의 상체를 덮고 화면 밖에 존재하는 여인의 머리마저 감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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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베는 1960년대에 여러 점의 여성 누드화를 제작했고, 이 때문에 퇴폐적이고 비윤리적인 화가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쿠르베가 그린 누드화들 중 몇 점은, 아카데미 화풍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외의 다른 누드화들은 생생한 사실 주의와 도발적인 화면 등으로 쿠르베 회화의 전형적인 특징들을 잘 나타내고 있는데, 특히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된 작품인 <세계의 기원><잠>은 후자의 전형을 보여준다. <세계의 기원>은 여러 해 동안 음란한 작품으로 비난받아왔고, 따라서 이전 소유자들이 작품을 드러내길 꺼려하다가 최근에야 비로소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쿠르베는 대상을 낭만주의적으로 이상화하는 기법을 모두 배제하고 그것을 생생한 사실주의로 대체했다.

화면 속에는 해부학적으로 정확히 묘사된 여인의 토르소가 배치되어 있으며, 여인의 얼굴은 드러나지 않는다. 작품 속에 쿠르베가 오랜 기간 동안 고심했던 인간의 기원에 관한 문제는 순수하게 육체적인 것으로 환원된다.

우리는 화면에서 여인의 치골과 복부를 바라볼 뿐이고 여인의 정체는 알아볼 수 없다. 이 특별한 작품 속에는 상징과 진실, 유물과 우의가 한데 뒤섞여 있다.


<더 많은 그림을 보시려면>


 

Posted by 이안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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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그림들2009. 12. 22.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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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화가. 인상주의의 아버지로 불린다. 세련된 도시적 감각의 소유자로 주위의 활기 있는 현실을 예민하게 포착하는 필력에서는 유례 없는 화가였다. 종래의 어두운 화면에 밝음을 도입하는 등 전통과 혁신을 연결하는 중개역을 수행한 점에서 공적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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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위에 느긋하게 누워 우리를 지그시 쳐다보는 이 여자만큼 발표되었을때 큰 소동을 일으킨 작품은 서구미술사에서 거의 유례가 없다. 만약 있다면 마네가 1863년, 즉 이 <올랭피아>보다 2년 전에 낙선전에 출품한 <풀밭 위의 식사> 정도일 것이다. <올랭피아>는 <풀밭 위의 식사> 직후에 그려져서 1865년 상롱에 출품되었는데 당시 신문이나 비평은 모두 이 천박하고 뻔뻔스러운 작품에 조롱과 공격을 퍼부었다. 배가 누런 창녀라든가 인도산 고무로 만든 암컷 고릴라라든가 출산을 앞둔 부인과 양가의 자녀들은 아무쪼록 피해서 지나가야 할 작품과 같은 문구가 줄줄이 뒤를 이어 저널리즘의 지면을 흔들었다. <풀밭 위의 식사> 때에는 마네에게 비교적 호의적이었던 쿠르베마저 금방 목욕을 마친 스페이드의 여왕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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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여자 그림이라면 르네상스 이래로 수도 없이 그려져 왔고 당시 루브르에도 얼마든지 걸려 있었다. 침대 위에 가로누운 포즈가 너무 대답하다는 것도 이우가 되지 못한다. 예컨대 <올랭피아> 보다 반세기도 더 전에 그려진 고야의 <벌거벗은 마하>가 이것보다도 조신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찍부터 스페인 회화에 빠져 있던 마네는 물론 이 작품을 그릴 때 틀림없이 고야를 의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 그것보다도 이 모티프 자체는 마네가 처음 생각해 낸 것도 아니고 분명히 훌륭한 선례가 있다. 현재 피렌테의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티치아노의 명작 <우르비노의 비너스>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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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그토록 소동이 일어났다는 것은 이 작품이 가진 특질과 역사적 의미를 잘 말해 준다고 생각된다. 100년 전 사람들은 예술을 보는 눈이 없었다든가 예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고 단언해 버리면 간단하고, 그러한 소동은 예술과는 관계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지만, 그러나 <올랭피아>의 경우는 반드시 그것으로 끝난다고 할 수 없다. 당시 저널리즘의 수 많은 문구나 전람회장에서의 소동과 같은 사건들을 모두 잊어버리고 모든 선입견을 버리고 바라보더라도 <올랭피아>에는 당장이라도 무너지려고 하는, 즉 장대하고 화려한 건축을 최후의 한 점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듯한 긴장감과 불안감이 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당시 사람들이 그녀에게 퍼부었던 비난에 대해 거의 공감 비슷한 것마저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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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사람들은 <올랭피아>가 자기들과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파리의 여자라는 것을 깨달았을 뿐더러 아가 <풀밭 위의 식사>의 뻔뻔스러운 여자와 같은 인물이라는 것도 알아챘다. 물론 마네 자신도 그것을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이 두 작품의 모델은 빅토린 뫼랑이라는 젊은 여인이며 마네가 파의 카르티에라탕(학생가)을 걷다가 우연히 보도 모델로 서도록 부탁했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마네의 마음에 드는 모델이어서 이 두 걸작 이외에 1860년대 마네의 작품에 동종 등장한다. 마네는 그 모델을 이상화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분명히 알아볼수 있는 모습 그대로 그렸다. 그것이 사람들이 분격에 한층 기름을 붓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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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올랭피아>는 스페이드의 여왕과 같이, 예컨대 트럼프 카드의 그림처럼 명확한 윤곽선과 평탄한 색면으로 되어 있다. <올랭피아>의 기초가 된 <우르비노의 비너스>와 비교해 보면 구도상의 유사성과 더불어 표현상의 차이도 분명히 알아볼수 있다. 한마디로 마네의 작품에서는 깊이를 부정하고 이차원의 평면성을 강조하려는 경향이 보인다. 예를 들어 티치아노의 그림에서는 배경 오른쪽 뒤편의 바닥 무의가 원근법에 의해 그려져 있는 데 비해 마네의 그림에서는 아무 무늬도 없는 밑칠로 바뀌어 있다. 또 나부의 신체에서도 두 작품은 거의 같으면서도 미묘한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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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이차원적 표현은 대상의 깊이나 두께, 둥글음을 나타내려고 했던 그네상스 이래 서구의 사실주의적 표현과 정반대 된다. 마사초 이래로 아니, 훨씬 거슬러 올라가 조토 이래로 서구의 회화는 이차원의 화면에 어떻게든 삼차원의 현실 세계를 표현하려는 노력을 거듭해 왔다. 원근법이라든가 명암이라든가 살붙이기라는 전통적인 기법은 사실적 표현을 위해 서구 회화가 만들어 낸 무기다. 그런데 쿠르베조차 의심한 적이 없던 그 전통적인 기법이 여기에서는 거의 전면적으로 부정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마네는 애초부터 삼차원의 세계를 화면에 구축하는 것 따위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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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 마네는 19세기 회화를 근대 회화의 방향으로 크게 밀어붙인 혁신자였다. 마네 이후 회화의 역사는 그 이전과 분명히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마네가 수행한 역사적 역할이 쿠르베의 역할보다 훨씬 컸다고 할 수 있다. 쿠르베는 시민 사회에 대한 반역자이고 혁명적 사상가이기는 했지만 혁명적인 화가는 아니었다. 쿠르베의 작품에서는 전 통적인 표현이 그래도 살아 있다. 그러나 마네의 작품은 분명히 전통과의 단절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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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를 자처한 쿠르베보다 신민 사회 속에서 자기의 지위를 가지려 했던 마네 쪽이 결과적으로 한층 더 혁명적이었다는 것은 조금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역사라는 것은 종종 그러한 역설에 의해 전개된다. 사실 쿠르베가 철저한 약인이었던 데 비해 마네는 세련된 도회 사람이며 사교계와 상류 시민 계급과의 교제를 즐기고 외출할 때는 언제난 구석석 차람새에 신경을 쓰는 멋쟁이였다. 살롱에 제출한 그림이 거부되자 쿠르베는 마침 잘 되었다는 듯이 자기의 혁신성을 주장했지만 마네는 진심으로 낙담했다. 마네는 기질적으로는 오히려 보수적이고 시시민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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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마네가 일단 캔버스를 향하자 쿠르베도 하지 못한 대담한 혁신을 이루어냈다. 마네 이후 근대 회화가 <올랭피아>에 의해 암시된 방향, 즉 삼차원적 표현의 부정과 평명성의 강조라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은 잘 알려져 있는 대로다. 마네 자신은 아마도 자신의 작품의 지닌 역사적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화가 마네는 그토록 혁신적이었으나 인간 마네는 그토록 보수적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마네는 천재의 희생자였다고 할 수도 있다. 사실 그 때문에, 그는 자기가 들어가고 싶어하던 사회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는 대사를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마네는 역사상 불후의 영예를 얻게 되었다. 19세기 후반에 시작되는 그대 회화의 역사는 그것을 분명히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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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안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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